• 반가사유상은 불교 수행의 기본 자세인 가부좌에서 한쪽 다리를 지면에 딛고 있는 ‘반가'와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실천해야 하는 철학적 행위인 ‘사유'가 합쳐져 탄생했다. ‘신성과 인간미가 하나의 작품에 융화되어 빚어진 예술품’이라고 해석된다.
  • “국보 83호는 얼굴에 손을 대고 명상하다가 법열에 들면서 입가에 미소가 감돌고… 손가락은 뺨에서 막 떨어지는 순간을 나타냈으니 이것이 훨씬 높은 예술성을 지녔다.” 역사학자 안병욱의 심미안에 감탄하며 유홍준은 저서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에 “명작의 비밀은 이처럼 디테일에서 두드러지는 경우가 많다”고 썼다.

반가사유상의 기원

  • 처음 등장한 곳은 인도의 간다라 지역이었다. 간다라의 반가사유상은 동아시아에서 만들어진 다른 그것처럼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무릎에 올린 자세로 정형화되어 있지 않다. 전체적으로 자연스럽게 풀어진 모습이며 다리의 자세는 다양하다.
  • 간다라에서 다양한 도상으로 출발한 반가사유상은 6세기 중엽 중국에서 미륵보살로 정착되기 시작했다.
  • 세속의 고뇌에서 벗어나고자 시작한 반가사유상의 인간적 사유는 시간이 흐르고 불교가 동쪽으로 전래되면서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신의 사유로 점점 바뀌어 갔다.
  • 6, 7세기의 고대 한국은 반가사유상이 절정을 맞은 무대였다. 당시 성행하던 미륵신앙과 결합돼 미륵보살상으로 완전히 정착했고, 독립된 공간에서 숭배되며 일본으로까지 전해졌다.
  • 특히 7세기 신라에서 반가상이 크게 유행했는데 이는 신라인들의 독특한 신앙형태와 화랑도의 결합이라는 내적 동기에서 나온 것으로 보고 있다. 15센티미터 안팎의 작은 금동반가사유상들은 세속을 초월한 느낌이 아니라 현세적인 고뇌를 하고 있는 듯한 형태 때문에 천상의 미륵상이 아니라 국가의 운명을 고뇌하는 화랑의 모습에 기인한다는 의견도 있다.
  • 신라에서 제작된 많은 미륵반가사유상들은 대담한 추상적 변형으로 더 미륵의 세계에 다가갔음을 느껴지게 해준다. 표현력이 모자라서 나타나는 고졸함이 아니라 오히려 표현력이 넘쳐서 나타난 의도적인 추상성이다.
  • 의도적인 추상성을 통해 얻고자 했던 제작자의 종교적, 예술적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 “체온이라고는 느낄 곳 없는 차디찬 금속체이고, 사실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강한 추상성으로 감싸여진 이 불상에서 불공이 겨냥한 것은 엄숙한 초인간적인 미륵의 힘이며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완전히 독창적인 자기 양식을 사용한 것이다.”(삼불 김원용)